Fright Night
비로소 시간이 간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날들. 본문
뭘 할지 결정할 수 있는 하루.
아침에 깨어 의무적으로 일을 하러 가고 점심을 먹고 또 일을 하다가 돌아오는 것이 아닌, 오늘은 뭘 할지 내일은 뭘 할지 결정할 수 있는 하루.
사무실을 그만두었고 6월의 마지막날은 근무를 안했지만 월급은 들어왔다. 그냥 짐을 챙겨 한마디 말만 남기고 떠나버린 나도, 월급을 문제없이 입금한 사무실 측도, 서로간에 더이상의 대화나 협의는 불필요하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사무실에서 대표,실장님과 친분이 있던 현장직분이 전화가 왔었다. 받고 싶지 않아서 받지 않았더니 오늘 오전에 카톡이 와서 서운하다며 밥이나 한끼 먹자고 했다. 나는 고민하다 밥 생각은 없고 커피나 같이 먹자고 했다. 밥을 먹을 만큼이나 할 얘기가 많진 않고 그냥 잠깐 얘기나 나누자는 생각.
일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는 노동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월급과 스트레스. 그것에 대해 얘기를 좀 나누었다. 어차피 그만둔 마당에 이 얘기 저 얘기 아무렇게나 떠벌리고 사람들에 대한 험담을 실컷 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내 월급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그 노동량을 견디고 일하고 싶지도 않았고, 서울에서 일하던 것과 다른 시스템에 내가 적응을 못한 것도 있다. 업무에 대한 자율성도 없고 지시에 따라 일을 하되, 현장직들로부터 원성은 실컷 들어야 했던 것. 나는 일을 못하는 편이 아닌데 다른 사람이 짜둔 틀을 건네받아 일을 하면서 왜 이렇게 일을 하냐는 내 귀에 들리지 않는 나에 대한 평가들.
부쩍 서울에서 일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같은 일을 시급을 받고 일을 하면서도 능력있는 사람들 밑에서 계속 '일을 배운다'는 기분이 들었던 때. 일한 만큼 돈을 받고 야근수당을 받으면서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내가 일한 만큼의 돈을 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여기는, 겉으로 보기에 내 상황은 나아졌을지 모르나, 업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아무것도 배울게 없는 사람들. 몇달을 일해도 이렇게 그만두고 나와버릴 만큼 정이 붙지 않는 사람들. 마지막 날 저녁 실장님이 알바 쓰는 것에 대해 얘길 화면서 가성비 운운할 때, 이 사람들도 나를 쓰면서 가성비를 따지고 그래서 그 월급에 그렇게나 야근이니 주말근무니 일을 많이 시켰겠구나 하고, 물론 추측은 했으나 확신이 들지 않도록 외면하고 있었을 때, 그걸 알게되고 더이상은 여기에 남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나와버리고 나니 남은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나 그들에게 가중될 업무량에 대한 미안함 보다, 내가 맡았던 일 그 자체, 그 프로젝트들이 제대로 마무리될까 하는 걱정만 남았다.
장마라더니 비는 안오고 흐리다 개었다 하는 날들만 계속 반복했었다. 카페에 나와서 찬 커피를 시키고 두모금 먹다가 배가 아파서 후회를 했고, 사람을 만나 한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고, 요 며칠의 일들에 대해 이렇게 생각을 하는 사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날 비가 주륵주륵 온다. 폴오스터는 중,고등학생때 참 좋아했던 작가였다. 당시에 출간된 책들을 다 사서 꽂아두고 어떤걸 읽을까 고민하며 아껴둘 정도로. 좀 더 큰 뒤에 고전문학들을 읽으면서 폴 오스터는 어딘지 가벼운 글이나 쓰는 작가로 조롱당하는, 과대평가 되고 있다는 사람들도 보았다. 하지만 중2때 중2 스러운 작가를 만났으니 나한텐 오히려 의미있는 작가이다. 대학생활을 마칠 때쯤 본가에 갔더니 내가 사서 꽂아둔 책들의 절반이 다 사라지고 남아 있는 몇권을 가져왔다. 한동안 이북의 편리함에 종이책을 잘 찾지 않다가 요 며칠 기분도 그렇고 해서 먼지 쌓인 책을 꺼냈다.
프로 백수가 되어 통장 잔고와 고정지출과 다음달 카드값을 계산하고 나에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며칠이나 될까 계산을 하니 얼마 되지 않는다.
프라하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