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ght Night
나의 시간. 본문
며칠 나쁜 생각을 해서일까, 아빠의 검사결과가 나쁘게 나왔다. 어제 진료를 갔는데 담당교수가 말을 무척 아꼈다고 하고 현재로선 약을 쓸 수 없다고 3주 뒤에 다시 검사 예약을 하고 왔다고 했다. 모두들 의기소침했고 아빠는 특히 예민해졌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 원장을 엄마가 따로 만나 아빠의 진료기록을 보며 면담을 했다는데, 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가 많이 되었고 간에 있던 몇개의 종양도 더 커졌다고 한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식으로 말했나 보다.
그런줄도 모르고 아침에 엄마가 전화가 왔는데 훌쩍거리길래 또 누구랑 전화를 하고 우셨나보다 했다. 용건은 가습기를 주문해 달라는 거였고 전화를 끊을 때쯤엔 조금 진정된 것 같았는데, 정오 즈음 다시 전화가 와서 전이도 되고 상태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왜 엄마 혼자 면담을 하고 그런 내용을 들으러 가냐고 조금 다그쳤다. 우리는 서로가 충격 받을 것을 걱정하고 있다. 아직 아빠한테는 얘기를 안했고 엄마는 서울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 보다 집에 모시고 내려가고 싶다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방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꼭 침낭에 들어간 것처럼 하고 누워 있었다. 몸을 웅크렸다. 오늘은 H가 서울에 출장을 다녀오는 날이라 하루 종일 시간을 쓸 수 있어서 혼자 어디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오전에 엄마를 전화를 받은 이후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 집은 며칠 째 청소도 하지 않아 엉망진창이고 지난 주말에 시골에 다녀오느라 쌌던 짐가방도 제대로 풀지 않고 방치해둔 채였다. 집이 더럽고 청소하고 정리해야 할게 많다는 사실 때문에 울고 싶었다. 의욕도 없고 움직이기도 귀찮았다. 춥진 않았는데 손발이 시렸다. 그냥 자고 싶었고 피곤하고 눈이 감겼는데 자꾸 슬픈 생각이 들어 울 것 같아서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빨랫감을 정리해서 세탁기를 돌려놓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을 했다. 씻고 목욕물로 화장실 청소도 하고 몸에 바디로션도 꼼꼼히 발랐다. 목욕하고 나니 몸이 따뜻해지고 춥지 않아서 창문을 앞뒤로 활짝 열고 이불을 털고 청소기를 돌렸다. 오랜만에 걸레를 빨아 밀대로 바닥을 닦았다. 환기를 위해서 창문을 좀 더 열어두었다. 세탁실 쪽에 습기가 차 벽에 곰팡이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귀찮아서 모른척 하고 있던 것을 닦아내고 락스를 뿌렸다. 빨래가 끝나 털어 널고, 지난 주말에 엄마가 준 새 이불을 다시 세탁기에 넣었다. 그러고 나니 시간이 벌써 오후 다섯시다.
꾸역꾸역 밥까지 챙겨먹고 나니 오빠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가서 원장을 만났다고 한다. 처음엔 다른 사람 차트를 잘못 본 줄 알았다고 한다. 11월 21일의 CT촬영에서도 전이는 없었는데 12월 21일 CT촬영에서는 대장, 콩팥, 복강에 전이가 되었고 간에 있던 2센티 종양이 5센티가 되었다고 한다. 굉장히 진행이 빠른 편이라고. 오빠는 아빠한테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 아직 거동이 불편하지 않고 통증도 많지 않을 때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할 수 있도록 알리고 싶다고 한다. 일단 9일에 방사선과 교수님과 또 면담이 잡혀 있고, 그 교수님이 전이된 사실을 알려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때까진 아빠에게 알리지 말자고 결정을 했다. 그리고 부모님 때문에 교수님에게 묻지 못했던 많은 질문들 때문에 따로 보호자 면담을 받는게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치료가 힘들다면 굳이 3주 뒤 혈액검사를 다시 받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처음 아빠가 아픈걸 알게되고 그 심각성을 알게 되었을 때, 아빠와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를 생각했다. 1개월? 3개월? 병원에서 '치료를 해보자' 했을 때는, 1년? 색전술을 한번 받고 방사선치료를 끝낸 후 검사결과가 좋았을 때는 3년이었다. 두번째 색전술을 받고 이번 검사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미래를 생각했다. 엄마는 25년 가까이 살았던 오래된 주택을 수리했다. 도배도 하고 다 무너져내려 누더기가 다 된 싱크대를 뜯어내고 새로 설치했다. 아빠가 작년 여름내내 공을 들였던 시골집에 세탁기도 사고 티비도 사고 양문형 냉장고도 샀다. 오빠부부와 우리부부는 아기를 갖는 것에 대해 각자 고민을 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허망하게도 의사가 3개월이라 한다. 마음의 준비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9일에 있는 교수면담에는 내가 함께 가기로 했다. 이번 주말에는 어찌할지 모르겠다. 서울에 놀러갈까, 근교에 바람쐬러 갈까 얘길 했었는데, 당장 내일의 일도 모른다는 말을 이렇게 또 뼈저리게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