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ght Night
고마운 사람들. 본문
지난 토요일 정말로 오랜만에 하늘이 맑았고 노을도 붉었다. 미세먼지 정말 나쁘다 ㅜㅜ 얼마만의 해질녘인지.
옥탑에 살때는 화분이 제법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요상한 일인데, 집에서 1분거리에 꽃집이 두개나 있었고, 걸어서 15분 또는 마을버스로 5분 거리에는 꽤 큰 화원이 있어서 일년 내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식물들을 판매했다. 이맘때면 생김새가 모두 다른 색색의 꽃들이 화원 앞 인도를 빼곡히 채웠는데, 그 사이에 난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누구도 화원을 탓하거나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꽃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꽤 단골이 되었다. 항상 현금결제였기 때문에 덤으로 흙을 받기도 했고 팔리고 한두개 남은 꽃화분도 받았다. 지금까지도 그 화원처럼 다양한 야생화를 많이 판매하는 곳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양재 꽃시장도 많이 팔리는 종류들 위주로 판매하기 때문에, 동네에 그런 화원이 있다는 것은 참 운이 좋은 것이었다. 옥탑에서는 아침이 되면 고양이들과 옥탑마당에 나가서 오늘은 어느 꽃이 피었는지 살피고 물을 주는게 일과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참 즐거웠다.
그리고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1톤 트럭에 이삿짐들과 같이 실려온 내 화분들은 고속도로를 달리며 맞은 바람 때문인지 부러지거나 이파리가 날아가고 없거나(ㅜㅜ) 성한 것이 없었다. 환경도 갑자기 변한 탓인지 대부분 시들어 버렸다. 넓은 베란다는 남서향인데도 불구하고 정오가 되어야 볕이 드는데, 나는 옥탑에서 키울 때처럼 물을 자주 주며 왜 화분들이 자라지 않는지 발을 동동거렸다. 애정을 주던 화분들을 보내고 나니 욕심이 시들해지기도 했고 반성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작년에는 생화를 사서 꽃꽂이를 자주 했다. 탐스럽고 눈부신 생화는 화분과 다른 매력이 있었다.
아빠를 보내며 몇개월을 집에서 잠만 자고 방치하다보니 그나마 있던 화분도 많이 죽었다. 싹 정리했던게 불과 한달 전이다. 얼마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중간중간 하나씩 사온 화분들이 그래도 네다섯개는 되었던 것 같다. 큰 비닐봉투에 말라죽은 식물의 흔적들과 흙을 담고, 화분은 추려서 분리배출 했다.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화분들은 모두 버렸고 자기로 된 것만 남겨두었다. 넓고 깨끗해진 베란다를 보며 미니멀 라이프를 중얼거렸다.
밖을 나가면 어김없이 봄을 맞은 화사한 화분들이 많았다. 한동안 의욕도 없었고 돈 쓰는 것도 그래서 사오진 않았다.
그런데 며칠전에 H가 퇴근하고 들어와서는 저녁먹고 산책을 가자고 했다. 퇴근해서 집에오면 소파와 한몸이 되는 사람이 왜 산책을 가자고 하는지 깜짝 놀랬는데, 나에게 꽃화분을 사주겠다고 했다. 그 길로 나가서 작은 포트에 담긴 화분을 사고 흙도 사고, 다음 날 분갈이를 하려고 보니 마땅한 화분이 없다며 이번엔 멀리 나가서 토분도 마구 사고 또 꽃을 사고 흙도 사고.. 그렇게 며칠 사이에 화분이 많이 늘었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겨우 버텨준 고마운 화분들도 분갈이 해주었다. 모처럼 집에 생기가 넘치고, 베란다에서 꼼지락 거리는 나를 보러 고양이들도 따라 나온다. 고양이가 먹는 풀인 캣그라스도 심었다.
이번에 H에게 무척이나 감동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 없으니 나를 지배하던 무기력함이나 우울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먼저 꽃을 사러 가자고 말도 다 해주고. 하지만 그게 내 봉인을 푸는 것인 줄은 몰랐겠지 ㅎㅎ. 덕분에 요즘 아침저녁으로 심어둔 꽃만 바라보고, 뿌린 씨앗은 왜 싹이 안올라오나 바라보고, 또 어디를 가야 그리운 서울의 화원처럼 예쁜 꽃들을 볼 수 있을지 찾아보고 있다. 이번엔 부디 화분에 벌레들이 꼬이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