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ght Night
160403. 짜증나지만 또 사무실 얘기. 본문
목련나무가 줄지어 선 골목길이 있다. 우리집 창에서 내려다보면 눈송이들이 주렁주렁 열린 것 같다. 어릴때도 목련나무를 좋아했다. 추운 겨울이 곧 끝남을 상징하는 꽃이라서. 그런데 엄마는 떨어진 꽃잎이 지저분하다며 목련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래전 일인데 이상하게 그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냥 앉아서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허송세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토요일에도 출근을 했다. 금요일부터 일이 많아서 토요일에 나와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금요일 오전에 파티션을 설치하며 문제가 생겼다. 기존엔 김과장과 내가 옆으로 책상을 붙여 앉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일을 하고 있었다. 김과장 짐이 워낙 많아서 내 책상 너머까지 짐을 두고 지냈는데, 나는 영역에 대해 민감한 편임에도 왠만하면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지냈다. 내 짐이 거의 없기도 하고 나는 또 내 옆에 붙은 책상에 짐을 올리면 되서. 그런데 파티션이 생각지 못하게 책상과 책상 사이도 설치가 되었다. 그러면서 김과장은 내 책상을 함께 쓰던 구역이 사라져서 자기 자리가 좁다고 인상을 썼다. 내 시선에선 그냥 칭얼거림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결국 자리 배치를 또 바꾸게 되었고 기존에 설치한 컴퓨터와 전화기와 온갖 케이블과 랜선을 다 뒤집어 엎었다. 이 사무실엔 제대로 꽂을 줄 아는 자가 나 뿐이었고 나는 어떻게든 금요일에 일을 해두려고 했는데 김과장이 코드를 다 뽑아버려 점심이 지나도록 팩스도 인터넷도 정상작동이 되질 못했다. 결국 김과장은 남들 두배만한 공간을 쓰게 되고 만족해 했고 나는 그간 참았던 불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화를 억누르며 또 하염없이 전화걸기를 하고 있었다. 김과장이 다섯시쯤 되어 토요일과 일요일 중 언제 나올 수 있냐고 물었다. "한달 내내 주말에 나오나요?"라고 대답하고 화가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왔다. 화를 누르며 다음주 주말엔 시댁에 가야해서 못나오니 이번주는 나오겠다고 했다.
화가 난건 주말 근무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과장은 본인이 업무 관련 자료를 전부 관리하며 내게 공유를 하지 않는다. 자긴 서류 업무나 하며 내게 허드렛일 따위만 시키는게 짜증이 났다. 일이 어렵고 쉽고를 떠나서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업무라는게 있는데 그걸 나에게 다 맡기고 자기는 키보드만 치고 있는데 분명 한시간이면 끝날 일을 몇시간째 붙잡고 있다. 왜냐하면 내게 맡긴 전화걸기를 자기가 함께 하긴 싫기 때문에. 서울에 있을 땐 그 부분은 따로 일하는 분들이 있었고 스트레스가 심하기 때문에 급여를 많이 줬다. 나는 수습기간이라며 최저임금에 불과하게 부려먹는데, 지지난주에 아르바이트로 이틀 나오신 분도 시급이 나보다 더 높았다. 나로선 이런 처우가 너무 싫었다. 결국 퇴근전에 김과장은 토요일에 알바 3명을 불렀다고 하며 나보곤 관리만 하고 쉬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알바 셋으론 끝낼 수 없는 양이라 나도 같이 일을 해야 했다. 김과장은 이번 업무에선 전화걸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토요일에 출근했더니 실장이 나와 있었다. 알바들 일 알려주고 밀린 잡일을 하고 있는데 실장이 잠깐 얘기를 하자며 불렀다. 우선 대표와 실장은 친구 사이라며 입을 뗐다. 뭔 얘길 하려고 서론이 이렇게 긴가 했는데 간추려 말하자면 대표와 실장은 친구사이에 동업자지만 둘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부분이 있다, 그게 바로 직원 처우에 대한 부분이다, 본인은 김과장과 내가 더 나은 처우=급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대표는 생각이 다르고 그건 대표 자리에 있기에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자기가 대표 몰래 급여를 더 주겠다는 것. 그리고 김과장은 몇년째 그렇게 돈을 주고 있으며 고정적이진 않으나 인센티브라고 생각하라며 대신 자기가 실장의 업무가 바빠서 따로 시키는 일이 많을테니 잘 해달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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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나야 뭐 돈을 더 받으면 좋을 일인데 뭔가 개운한 느낌이나 마냥 기쁘지도 않은 것이다. 실장은 이 얘길 하며 앞뒤로 대표에 대한 존중이나 대표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본인을 깎아가면서까지 설명을 보탰고, 인센티브라는 그 돈은 사적인 일에 대한 공적인 보상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동안 김과장이 실장을 그렇게 따르던 이유는 알게 되었고 며칠전만 해도 사무실이 이사를 하는데 자기는 돈이 없어(담배만 덜 펴도 될것을) 교통비조차 부담이 된다며 징징거리고 짜증을 내다가 어느 순간 표정이 밝아진 이유도 알게 되었다. 일이 매우 바쁜데도 불구하고 실장이 한글파일을 만들어 달라거나 뭘 입력해 달라고 하면 열일 제치고 하던 것도, 밤 늦게까지 남아서 실장님 일을 도와주고 다음날 나왔는데도 평소와 다르게 짜증을 안 냈던 날도 이해가 됐다.
공개적으로 자신에 대한 처우개선을 외치지 못하고 말을 꺼내봤자 본전도 못 찾는 환경에서 남 몰래 돈을 받아 그걸로 위안을 삼고 생계를 이어가는게 현명한 걸까?.. 모르겠다. 분명한 점은 실장이 대표 모르게 급여의 의미로 돈을 더 준다고 해서 실장이 딱히 착한 사람도 아니고 그걸 받는 것에 고마워해선 안된다는 것 같다. 노동의 댓가라는 것이니까.
아무튼 그외에 실장이 한 얘기가 있는데 나로선 이게 더 반가웠다. 그동안 해오던 업무는 일반 사기업과 관련된 일이 많았는데 앞으로는 지자체 쪽으로도 영역을 넓힐 생각이라며, 해오던 것은 김과장이 하고 나더러는 지자체 쪽 일을 맡아보라고 했다. 내가 그동안 불만을 가지던 그것, 김과장의 일을 거들기만 하고 내 단독 업무가 없다는 것에 선을 명확히 그어준 것. 내 기분을 표현하자면 ㅋㅋㅋㅋㅋㅋㅋㅋㅋx100 정도. 그리고 면담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니 3월부터 준비를 시작했고 당장 4월부터 일 폭탄이 터지는 초대형 프로젝트 관련 서류들이 책상위에 30센티 넘게 쌓여 있었다 ㅋㅋㅋㅋㅋㅋ 이제 내일부턴 출근해서 김과장한테 오늘은 뭐 하면 되냐고 안 물어보고 내 자리에 쌓인 서류나 들추고 있으면 됨. 김과장이 뭐 시키면 바쁘지만 도와주겠다고 생색 엄청 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