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ght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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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순간들

산에 다녀오다.

앤_ 2017. 4. 11. 16:29


월요일은 H의 휴가였다. 지난주에 서울 본사를 다녀오더니 상급자들과 면담을 했다며 무슨 얘길 했는지는 말하지 않고(대충 짐작만 한다), 월요일은 휴가를 썼다고 하길래 사실 무슨 일이 있는건가 조마조마했다. 어차피 휴가를 써도 집에서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여러 전화를 받고 사무실과 통화하고 그러다보니 맘놓고 멀리 여행을 가거나 하긴 어렵다. 운전하고 가는 중에도 계속 전화가 걸려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집에 있기도 뭐해서 간단히 아침을 차려먹고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휴양림에 다녀왔다. 업무전화가 잠깐 줄어드는 점심시간인 12시에 출발했다 ㅎㅎㅎ.

산은 이제야 겨우 봄이 온 듯 했다. 휴양림 아래쪽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메타세콰이아 숲이 있었는데, 고개를 한껏 젖혀야 꼭대기가 보이는 키 큰 나무들이 앙상하게 서있었다. 월요일이라 사람은 적었고, 간만에 등산을 하겠다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출발한 우리는 초행이라 방향을 마구 헤맸다. 겨우 길을 찾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몇분 못가서 숨을 헉헉 거렸다. 등에 맨 가방에는 먹을것과 마실것을 잔뜩 꾸려 무거웠다. 다리는 너무 무겁고 사람도 없겠다 그냥 네 발로 기어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평생 H의 놀림을 받을 것 같아서 그것만은 참았다. 

운동을 좋아라 하는 H는, 그래도 시간이 없어 운동을 거의 안하고 사니까 나랑 체력이 비슷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혼자서 뛰어 올라가도 정상까지 갈 것 같은 사람이었지만 산에서도 어김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또 나와 속도를 맞춰주느라 천천히 올라갔다. 정상에 겨우 올랐는데 찾아보니 해발 320m. 체감은 3200m는 될 것 같았는데 ㅜㅜ 4시간 정도는 올라온 것 같은데 시간도 겨우 1시간이 넘었다. 내려갈때는 올라온 길로 가지 않고 반대편 최단거리로 내려갔는데 계속 계단만 나와서 아주 따분했다. 이쪽 길로 올라오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오후 4시 정도밖에 안되어 집으로 그냥 돌아오기가 아쉬웠는데 그렇다고 다른 곳에 들러 놀기엔 체력이 안될 것 같아서 집으로 왔다. 오는 길에 김밥과 떡볶이, 튀김, 오뎅 등을 잔뜩 포장해 와서 점저로 실컷 먹었다. 

H는 등산을 좋아해서 종종 산에 가자고 하는데 나는 워낙 체력이 없고(ㅜㅜ) 등산도 싫어하고 땀 흘린 채로 몇시간 있는 것은 더욱 싫어하다보니 우리는 산에 가기만 하면 싸웠다. 일단 시작하면 정상을 가고 싶어하는 그와, 등산이고 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씻고 눕고 싶은 나. 산에만 가면 싸우니까 언젠가부터 산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는 처음으로 우리가 다투지 않고 정상까지 산을 다녀온 기념적인 날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등산으로 생각하지 않는 뒷동산 정도로 여기는 곳일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돌아오는 길에는 신이 나서 근처에 낮은 산에 다음에 또 함께 가자고 얘기했다. 

다음에 갈 땐 가방을 좀 가볍게 꾸려야 겠다. 정상에서 마시는 따뜻한 커피에 로망이 있어서 큰 보온병에 커피를 가득 담아 갔는데 정작 산에서 얼음물 밖에 생각이 안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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