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여섯 살의 나이에도 이미 드러나는 기질로 보아 그는 이 느낌과 저 느낌을 가름하지 못하고 앞날에 대한 기쁘거나 슬픈 예감에 따라 지금 이 순간의 기분이 달라지는 사람들의 부류에 속하는 터라,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감정의 수레바퀴가 조금만 돌아도 그 그늘이나 빛이 드리우는 순간을 선명하게 포착하기 마련이라, 제임스 램지는 어머니의 말에 한껏 부푼 마음으로 가위를 놀렸다.
하지만 그런 게 싫어서가 아니에요, 라고 아이들은 말했다. 생김새나 태도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싫은 것이었다. 그들이 뭔가 흥미로운 것, 사람들이나 음악, 역사에 대한 얘기를 하거나, 하다못해 저녁 날씨가 좋으니 밖에 나가 앉을까 하는 말만 해도, 탠슬리는 사태를 이리저리 돌려 결국 자신을 내세우고 그들을 깎아내리고야 만다, 무엇이든 그 특유의 신랄한 방식으로 까발리는 바람에 다들 기분을 잡치고야 만다는 것이 아이들의 불만이었다.
하지만 어떤 때는 문득 뜻밖에도, 특히 그녀의 마음이 당장 손에 들고 있는 일거리에서 약간 벗어나거나 할 때면, 파도 소리는 그런 친절한 음성은커녕 둥둥대는 유령 북소리처럼 가차 없이 인생의 박자를 두들겨 섬이 파괴되고 바다에 삼켜질 것만 같은 불안을 안겨 주면서 그녀의 삶이 그저 바쁜 일상 속에 소모되어 버리는, 무지개처럼 덧없는 것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바로 그 소리가, 다른 소리들 밑에 깔려 희미해졌던 파도 소리가, 갑자기 그녀의 귓전에 우레처럼 밀려들어, 그녀는 충동적으로 공포를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뭔가 필요에 이끌린 듯 매일 저녁 그곳에 가곤 했다. 마치 마른 땅에서는 정체되어 있던 생각들이 그곳에 이르면 물결에 실려 돛을 달고 떠나가는 듯하고, 몸에도 일말의 해방감이 찾아드는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서 무엇인가가 완결되었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광활한 풍경이 바라보는 자보다 1백만 년은 더 오래갈 것(이라고 릴리는 생각했다)이며 완전한 휴식에 잠긴 대지를 내려다보는 하늘과 이미 교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램지의 인생을 달아보고 동정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마치 그가 젊은 날의 고독과 준엄함이라는 영광을 버리고 날개를 퍼덕이고 꼬꼬댁거리는 가정사에 꼼짝없이 묶여 버리는 것을 눈으로 보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여기 배나무 곁에 꼼짝 않고 서 있는 그녀에게는 그 두 사람에 대한 갖가지 인상이 밀려들어,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마치 받아 적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말하는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는 그녀 자신의 목소리로, 부인할 수 없고 영속적이면서 모순되는 일들을 누가 불러 주는 것도 아닌데 줄기차게 말하고 있어, 심지어 배나무 껍질이 갈라지고 우툴두툴한 것까지도 영구히 거기 고정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위대한 사랑 이야기, 어긋난 사랑 이야기, 좌절된 야망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도 한 번쯤은 허심탄회하게 자기도 그런 일이 있었다든가 겪어 보았다든가 하는 말을 할 법도 했건만, 그녀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말이 없었다. 그녀는 배우지 않고도 아는 것이 많았다. 그녀의 단순성은 영리한 사람들이 그르치는 것을 똑바로 꿰뚫어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었다. 익히 보는 징후들, 그가 사람들을 외면한 채, 균형을 되찾으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자기 껍질 안에 들어앉아 묘하게 도사리는 태도에서, 그녀는 그가 기분이 몹시 상했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배려가 그토록 놀랍게 결여된 채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 문명의 엷은 베일을 그토록 제멋대로 거칠게 찢어 버린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인간다운 예의를 무참히 짓밟는 것으로 여겨져서,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멍멍하고 눈앞이 아득한 채로, 마치 그 우툴두툴한 우박이 퍼붓는 것이나, 구정물을 덮어쓰는 것을 감내하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안전했다. 다시금 자신만의 세계를 되찾은 것이었다. 파이프에 불을 댕기다 말고, 그는 다시 한 번 창가의 아내와 아들을 바라보았다. 급행열차에서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어 농장들과 나무들과 작은 집들을 삽화처럼 바라보고는 읽고 있던 무엇인가를 확인한 듯 만족스럽고 힘차게 다시 책으로 돌아가듯이, 그는 아들과 아내를 딱히 구분하지도 않은 채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만족스러워져서 자신의 찬란한 지성의 힘을 온통 쏟고 있는 문제에 대한 완전하고 분명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을 집중했다.
그렇다면 그의 명성은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 죽어 가는 영웅이라 해도 죽기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훗날 자신을 기억할까 생각하는 것은 허용될 만한 일이다. 그의 명성은 어쩌면 2천 년쯤 갈 것이다. 그런데 2천 년이 뭐란 말인가? (램지 씨는 산울타리를 응시하며 냉소적으로 물었다.) 정말이지 산 위에 올라 그토록 허비한 세월을 굽어본다면 2천 년쯤이야 뭐란 말인가? 발끝에 차인 돌멩이 하나도 셰익스피어보다 오래갈 것이다. 그 자신의 작은 불빛은 그리 밝지는 않아도 1년에서 2년쯤은 빛날 것이고, 그다음에는 좀 더 큰 다른 빛에, 또 그다음에는 한층 더 큰 빛에 흡수될 것이다.
본능적으로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 아니라 자기 마음속 어딘가에 있는 용렬함을, 인간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흠이 많고 경멸할 만하며 기껏해야 자기 본위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문명의 발전은 위대한 인물들에 달려 있는가? 평균적인 인간의 삶은 파라오들의 시대보다 오늘날 더 나은가? 하지만 평균적인 인간의 삶이야말로 문명의 척도가 아닌가? 그는 자문했다. 어쩌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최대의 선은 노예 계층의 존재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지하철의 승강기 문을 여닫는 사람도 필요하니까.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생각을 물리치기 위해, 그는 예술의 우월성을 반박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세상은 평균적인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주장할 셈이었다. 예술이란 인생의 맨 꼭대기에 얹힌 장식에 불과하며, 인생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인생에는 셰익스피어가 꼭 필요하지 않다고. 자신이 왜 셰익스피어를 폄하하고 영원히 승강기 문 곁에 서 있는 사람의 편을 들려는 것인지 명확히 의식하지 못한 채, 그는 산울타리에서 잎사귀 하나를 잡아챘다.
그것은 변장이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터놓기 두려워하는 자의, 이게 내가 좋아하는 거고 이게 나라는 사람이오 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의 피난처였다. 윌리엄 뱅크스나 릴리 브리스코가 보기에는 딱하고도 맞갖잖은 일이었으니, 그들로서는 도대체 왜 그런 위장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왜 항상 칭찬이 필요한지, 왜 사상에서는 그토록 용감한 사람이 인생에서는 그토록 소심한지, 얼마나 이상할 만큼 존경스러우면서도 가소로운지.
다소 위선자 같다고? 그녀는 되뇌었다.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아 ─ 더없이 진지하고, 더없이 진실하고(그가 가까이 와 있었다), 더없이 좋은 사람이지. 하지만 고개를 숙이면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만 몰두해 있고, 폭군 같고, 부당해.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야만 램지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평정을 잃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곧장 바라볼 때면, 그녀가 <사랑에 빠진 상태>라 부르는 것이 후광처럼 그들을 감싸곤 했다. 그들은 사랑의 눈을 통해 본 세상이라는, 저 비현실적이지만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 하늘도 그들에게 달라붙었고, 새들도 그들을 통해 노래했다.게다가, 한층 더 흥미로운 사실은, 램지 씨가 다가왔다 멀어졌다 하는 것이나 램지 부인이 제임스와 창가에 앉아 있는 것, 그리고 구름이 움직이고 나무가 굽어지고 하는 것들을 바라보노라면, 삶이란 낱낱이 살아지는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지다가도 또 일시에 파도처럼 커다란 전체가 되어 사람을 휘말아 올리기도 하고 해변에 철썩 던져 버리기도 하는구나 하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예순이 갓 지난 나이와 깔끔하고 냉정한 성격, 마치 하얀 실험용 가운이라도 입고 있는 듯한 그에게 그런 표정은 황홀경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지금 릴리의 눈앞에서 램지 부인을 바라보는 태도는 수십 명 젊은이들의 사랑에 맞먹는(램지 부인도 수십 명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터인데) 황홀경이었다. 그것은 증류되고 걸러진 사랑이라고, 그녀는 캔버스를 옮기는 척하며 생각했다. 대상을 붙잡으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사랑, 하지만 수학자들이 수학 기호에 바치는 사랑이나 시인들이 시구에 바치는 사랑처럼, 온 세상에 퍼져 인류의 성취에 기여하는 사랑이었다. 정말이지 그런 사랑이었다. 왜 저 여자가 그토록 마음을 기쁘게 하는지, 아들에게 동화를 읽어 주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과학 문제를 풀었을 때와 똑같은 효과를 미치는지,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면 뿌듯하여 마치 식물의 소화 기관에 대해 무엇인가 절대적인 것을 증명했을 때와도 같은 느낌이 드는지, 야만성이 정복되고 혼돈의 지배가 억제되었다고 느껴지는지, 뱅크스 씨가 말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이 어떻게든 그 사랑을 나누어 가질 것이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기 그림을 바라본다는 그 끔찍한 시련을 견디기 위해 자신을 추슬렀다. 만일 누군가에게 보여야 한다면, 다른 사람보다는 뱅크스 씨가 덜 불편할 것이었다. 그래도 누군가 다른 사람의 눈이 자신의 33년간의 잔재를 본다는 것, 나날의 삶이 그동안 그녀가 한 번이라도 입 밖에 내어 말하거나 내보인 것보다 더 은밀한 무엇인가와 섞여 있는 퇴적물을 본다는 것은 고문과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엄청나게 흥분되는 일이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는 평소에 우울하고 낙심해 있으면서도, 전반적으로는 그녀보다 훨씬 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인간적인 근심 걱정을 덜 겪어서 ─ 아마 그래서일 것이었다. 그는 항상 자기 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그녀 자신이 그가 말하듯 <비관적>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는 삶을 ─ 길지 않은 시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 자기가 살아온 50년을 생각했다. 삶은 그렇게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삶이란, 하고 그녀는 생각했지만,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저 흘긋 바라볼 뿐이었다. 삶이 거기 있다는 것은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지만, 그 느낌은 확실히 실감되면서도 자기만의 것이라 자식들과도 남편과도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삶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진행 중이었고, 그 거래에서 그녀는 삶을, 삶은 그녀를 줄곧 서로 이기려 들었다. 때로는 대화를 하기도 했고(그녀가 혼자 앉아 있을 때면), 때로는 감동적인 화해의 장면들도 있었다고 기억하지만, 대개는, 묘하게도, 자신이 삶이라 부르는 그것이 끔찍하고 적대적이고 틈만 보이면 공격을 해올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원한 문제들이 있었다. 고통이니 죽음이니 가난한 자들이니 하는.
우리의 겉모습,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유치할 따름이라는 것을. 그런 외관 밑에는 어둡고 광활하고 측량할 수 없이 깊은 무엇이 있으며, 우리는 이따금씩 표면으로 떠오르는데, 그것이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인 것이다.
그녀의 지성은 이 세상에 이성도 질서도 정의도 없다는 사실, 고통과 죽음과 가난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너무 비열해서 저지르지 못할 배신 따위는 없다는 것,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어떤 행복도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녀는 굳건하고 침착한 태도로,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약간 오므린 채, 뜨개질을 계속했다.
그러자 문득, 아무 이유 없이, 마치 지하철에서 나올 때나 현관의 초인종을 누를 때 갑자기 닥쳐오는 것처럼, 그들 위에 어떤 의미가 덮이면서 그들을 어스름 가운데 서 있는 결혼의 상징, 남편과 아내의 상징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실제 모습을 넘어서던 상징적 윤곽이 걷히면서 그들은 다시금 아이들이 공놀이하는 것을 구경하는 램지 씨와 램지 부인으로 돌아갔다.
그 괴리감에 ─ 생각은 저기 가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수프를 떠 담고 있다는 것 ─ 눈썹을 추켜올리면서, 그녀는 점점 더 그 소용돌이의 바깥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는 마치 그늘이 드리워 색깔을 앗아 가자, 비로소 사물이 참되게 보인다는 느낌이었다. 방은(그녀는 방을 둘러보았다) 정말이지 누추했다.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지금 이 식탁에서조차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 어디론가 알 수 없이 흘러가는 삶이, 거기서는 잔잔한 호수처럼 둑 안에 밀봉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제 모든 것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문턱을 넘어서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사라져 가는 그 장면에 조금 더 머물고 싶은 것처럼. 그러고는 민타의 팔을 잡고서 방을 나서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깨 너머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보면서, 그것이 이미 과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세월이 가다
그리하여 모든 불이 꺼지고, 달도 지고, 가는 비가 지붕을 두들기면서, 거대한 어둠이 퍼붓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그런 홍수를, 넘쳐 나는 어둠을, 이겨 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둠은 열쇠 구멍과 틈새로 기어들고, 창문의 블라인드 주위로 새어 들고, 침실로 들어와, 여기서는 물병과 대야를, 저기서는 빨갛고 노란 달리아꽃이 담긴 화병을, 또 저기서는 서랍장의 각진 모서리와 단단한 형체를 집어삼켰다.
그래서 그녀가 그렇게 뒤뚱거리며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하는 모습은 삶이 그저 기나긴 슬픔이요 고생임을,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눕는 삶, 물건들을 꺼내고 치우고 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 주는 듯했다. 일흔이 다 되도록 그녀가 아는 세상은 수월하지도 아늑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쳐서 굽어졌다. 침대 밑에서 무릎을 꿇고 마루의 먼지를 쓸어 내느라 삐걱대고 끙끙대면서, 그녀는 자문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가려나?
하지만 이렇게 잠들고 조는 동안에도, 그해 여름 늦게는 부드러운 천 위를 둔하게 내리치는 규칙적인 망치 소리처럼 불길한 소리들이 들려왔고, 그 거듭되는 충격에 숄은 더 늘어졌고 찻잔들에는 금이 갔다. 이따금씩 찬장에 넣어 둔 유리잔이 잘그랑대기도 했다. 마치 거인이 고통을 못 이겨 내지르는 비명에 찬장 안에 세워 둔 유리잔들마저 진동하는 듯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정적이 찾아들었고, 밤이면 밤마다, 때로는 장미꽃이 만발하고 햇살이 담벼락에 선명한 꽃 그림자를 드리우는 환한 대낮에도, 이 침묵과 무관심과 온전함 속으로 무엇인가 쿵 하는 소리가 떨어지는 듯했다.
-등대
아직 깨끗한 잔들이 놓여 있는 기다란 식탁 앞에 혼자 앉아서(낸시는 다시 나가 버렸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절연된 듯한 느낌으로 그저 계속 바라보고 묻고 궁금해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집도, 이 장소도, 이 아침도, 모든 것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이곳에 아무 애착도 연고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일어난 일도 ─ 저 밖의 발소리, 외치는 목소리(<그건 찬장에 없어, 층계참에 있어> 하고 누군가 외쳤다) ─ 알 수 없는 의문처럼 느껴졌다. 마치 사물을 한데 묶고 있던 끈이 잘려 나가 모든 것이 이리저리 떠돌다 결국은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되는대로인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그녀는 빈 커피 잔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는 마치 추방당한 왕처럼 보였다. 제임스는 고집스럽게, 아뇨, 가고 싶어요, 라고 대답했고, 캠은 좀 더 비참한 표정으로, 아뇨, 물론 가고 싶지요, 라고 얼버무렸다. 둘 다 갈 준비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거야말로 비극이라는 ─ 관보(棺褓)나 유해(遺骸)나 수의(壽衣)가 아니라, 이처럼 아이들이 강요당하고 정신이 짓눌려 있는 것이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는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순간 그는 무엇인가 원시적인 돌풍의 힘으로(그는 도저히 더는 자제할 수가 없었다), 어찌나 딱한 신음 소리를 냈던지, 세상 어떤 여자라도 뭔가 동정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했다 ─ 나만은 빼고, 릴리는 씁쓸하게 자조하며 생각했다. 나는 여자도 아니고, 까다롭고 성질 나쁜, 말라비틀어진 노처녀일 뿐이니까.
이런 경우 뭐라고 하더라? ─ 오, 램지 씨! 친애하는 램지 씨! 스케치를 하던 벡위스 부인 같은 친절한 노부인이라면 대번에 그렇게 적절한 말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게 안 되었다. 그들은 온 세상과 단절된 채 거기 서 있었다. 그의 엄청난 자기 연민과 동정에 대한 요구가 그녀의 발치에 쏟아져 웅덩이처럼 고였다. 그런데 그녀가 한 것이라고는, 가련한 죄인인 그녀는, 치마를 조금 더 발목 쪽으로 바짝 당겨 젖지 않게 한 것뿐이었다. 그녀는 붓을 든 채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
그녀는 묘하게 분열된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의 일부는 저 멀리 끌려 나가고 ─ 옅은 안개가 낀 조용한 날이었고, 등대는 아득히 멀어 보였다 ─ 다른 일부는 고집스럽게 여기 잔디밭에 못 박혀 있는 듯이 느껴졌다.
어디서 시작할까? ─ 어디에 첫 획을 그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캔버스에 한 획을 긋는 행위는 무수한 위험들에 뛰어드는 것을, 돌이킬 수 없는 결정들을 해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관념 속에서는 단순해 보이던 온갖 것이 실제로는 대번에 복잡해져서, 마치 절벽 꼭대기에서 보는 파도는 가지런하지만 그 가운데서 헤엄치는 자에게 보이는 파도는 깊은 골과 거품 이는 마루로 나뉘는 것과도 같았다.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첫 획을 그어야만 했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게 다였다 ─ 단순한 질문이지만, 해가 갈수록 죄어드는 것이었다. 위대한 계시는 결코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들, 어둠 속에 뜻하지 않게 켜지는 성냥불처럼 반짝하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캠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 모든 오솔길과 잔디밭이, 자신들이 그곳에서 살았던 삶으로 촘촘히 짜인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사라져 버렸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쓸려 나가 과거가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이제 이것이 현실이었다.
그의 무신경한 맹목성과 독재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얼마나 망치고 쓰라린 폭풍우를 일으켰던가를, 그래서 아직까지도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분노로 떨며 그의 명령들을, 때로 무지막지한 명령들을 상기하는가를. 이래라저래라 하고 휘두르는 것을,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는 것을.
그녀는 모래 속에 작은 구멍을 파고 그 순간의 완벽함을 묻어 두는 기분으로 다시 덮었다. 그것은 마치 과거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붓으로 찍어 쓸 한 방울의 은과도 같았다.
그런데 이런 것이, 하고 릴리는 녹색 물감을 붓으로 찍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사람들에 대해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른바 그들을 <안다>거나 그들에 대해 <생각한다>거나, 심지어 그들을 <좋아한다>는 것이지! 실은 전혀 사실이 아니고, 그녀가 만들어 낸 장면일 뿐인데.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그림 속으로, 과거 속으로, 터널을 파 들어가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이제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바라던 바와는 전혀 딴판이 되었어요.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하답니다. 저도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해요. 산다는 게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렇게 생각하자 부인의 전 존재가, 그녀의 아름다움마저도, 잠시 먼지투성이 퇴물이 되어 버리는 듯했다. 잠시 릴리는 뙤약볕을 등지고 그렇게 선 채, 레일리 부부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램지 부인에 대해 승리감을 느꼈다.
어떻게 말로 표현한다는 말인가, 몸으로 느끼는 이런 감정들을? 저기 저 공허함을? (그녀는 거실 앞 층계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너무나 텅 비어 보였다.)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도 인생은 여전히 이런 것 ─ 이렇게 놀랍고 뜻밖이고 알 수 없는 것 ─ 일 수 있나요?
하지만 그가 노상 주머니에 넣고 다녀 귀퉁이가 닳은 그 책이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 중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책에 몰두한 나머지, 방금 그랬듯이 잠깐 얼굴을 들어도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뭔가 생각을 좀 더 정확히 해두려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의 정신은 다시금 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 고요함, 이 공허함, 이른 아침 시간의 비현실적인 느낌과 잘 어울렸다. 가끔은 사물이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하고 그녀는 길게 빛나는 창문들과 푸른 연기 자락을 잠시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라든가, 오래 앓고 났을 때, 아직 습관들이 되돌아와 표면을 짜 맞추기 전에는 그런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어 놀라게 되는 것이다. 뭔가 나타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럴 때면 삶이 훨씬 더 생생해지지.
10년 전에 그녀가 지금 서 있는 곳에 서서, 이 장소와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완전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랑도 가지가지니까. 사랑하는 자들 중에는 사물의 요소들을 골라내어 한자리에 배열함으로써 실제 삶에는 없는 완결성을 부여하는 재주를 가진 이도 있을 것이었다. 어떤 장면이나 사람들(이제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린)과의 만남을 가지고서 우리의 생각이 머물고 사랑이 넘나드는, 현실이 압축된 수정구 같은 것을 만드는 재주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들을 아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세부적인 것이 아니라 윤곽만 아는 것, 누군가의 정원에 앉아 언덕의 능선이 멀리 히스 들판으로 어슴푸레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 그녀는 그를 그런 식으로 알고 있었다.
하기야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상당 부분은 따지고 보면 이상야릇하고, 결국 자기 자신의 입장에 맞추기 마련이니까.
저 앞에 나타난 등대는 뚜렷한 흑백으로 삭막하게 우뚝 서 있었고, 바위에는 파도가 마치 박살 난 유리처럼 하얗게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바위들의 울퉁불퉁한 윤곽도 눈에 들어왔다. 등대의 창문들도 보였는데, 그중 하나에는 흰 페인트가 칠해져 있고, 바위에는 녹색 뗏장이 조금 덮여 있었다. 한 남자가 나왔다가 망원경으로 그들을 보고는 다시 들어갔다. 그러니까 저렇게 생겼구나, 제임스는 생각했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맞은편 만에서 바라보았던 등대라는 것은 헐벗은 바위 위의 삭막한 탑일 뿐이었다. 그는 만족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성격에 관해 어렴풋이 느끼던 바를 확인해 주었다. 나이 든 부인네들은, 하고 그는 집의 정원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아마 잔디밭에서 의자를 이리저리 끌고 있겠지. 가령 벡위스 노부인은 항상 인생이란 얼마나 좋은 것이냐 얼마나 감미로운 것이냐 그들은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행복해야 할 것이냐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사실 인생이란 꼭 저 등대 같은 것이리라고, 제임스는 바위 위에 우뚝 서 있는 등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것 봐! 캠은 속으로 제임스에게 말했다. 결국 칭찬을 들었잖아. 그거야말로 제임스가 원하던 바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원하던 것을 얻었으므로 그는 만족한 나머지 그녀도 아버지도 다른 아무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똑바로 앉은 채 키를 잡고서, 무뚝뚝하고 다소 뿌루퉁한 표정이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아무에게도 그 기쁨을 나눠 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를 칭찬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보여야만 했다. 하지만 원하던 걸 드디어 얻었잖아, 캠은 생각했다.
-등대
저 앞에 나타난 등대는 뚜렷한 흑백으로 삭막하게 우뚝 서 있었고, 바위에는 파도가 마치 박살 난 유리처럼 하얗게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바위들의 울퉁불퉁한 윤곽도 눈에 들어왔다. 등대의 창문들도 보였는데, 그중 하나에는 흰 페인트가 칠해져 있고, 바위에는 녹색 뗏장이 조금 덮여 있었다. 한 남자가 나왔다가 망원경으로 그들을 보고는 다시 들어갔다. 그러니까 저렇게 생겼구나, 제임스는 생각했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맞은편 만에서 바라보았던 등대라는 것은 헐벗은 바위 위의 삭막한 탑일 뿐이었다. 그는 만족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성격에 관해 어렴풋이 느끼던 바를 확인해 주었다. 나이 든 부인네들은, 하고 그는 집의 정원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아마 잔디밭에서 의자를 이리저리 끌고 있겠지. 가령 벡위스 노부인은 항상 인생이란 얼마나 좋은 것이냐 얼마나 감미로운 것이냐 그들은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행복해야 할 것이냐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사실 인생이란 꼭 저 등대 같은 것이리라고, 제임스는 바위 위에 우뚝 서 있는 등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자해설
특히 이것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에서도 작가의 심중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중략)이런 자전적 기록들을 보면, 『등대로』는 아주 세세한 데까지 작가 자신의 추억들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녀는 나이가 꽤 들어서까지도 부모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이 작품을 쓰면서 비로소 그들을 <마음속에 묻어 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들에게도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그러면서도 괴팍한 성격으로 가족에게 부담을 안겨 주었다. 천재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감과 격정을 지닌 자라는 당대의 통념대로 그는 불같은 성정을 제어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떨쳐 버리지 못하여 늘 전전긍긍하는 면도 있었다. 문필가로서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진짜 천재는 못 된다는 자의식 때문에 늘 칭찬에 목말라하던 그를 <달래고 격려하고 영감을 주고 간호하고 기만하는> 역할을 도맡던 줄리아가 세상을 떠나고, 잠시나마 그 역할을 힘겹게 감당하던 스텔라마저 그 뒤를 잇자, 남은 두 딸은 마치 <야수와 함께 우리에 갇힌 것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울프에게 『등대로』의 첫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1913년에서 1916년 사이, 거듭되는 신경 쇠약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글을 쓰려다 보니, 『등대로』를 구상하게 된다 ─ 거기서는 내내 바닷소리가 들릴 것이다. 내 책들에 <소설> 대신 다른 명칭을 지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버지니아 울프의 새로운 ○○○. 하지만 뭐라고 하지? 엘레지(哀歌)?
애초의 구상에서 보듯이, 『등대로』는 작가 자신의 부모와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이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울프는 『등대로』를 쓰고서 비로소 어머니에 대한 고착에서 벗어났다고 하며, 아버지에 대해서도 비슷한 고백을 한 바 있다.
울프는 1919년 에세이 「현대 소설론Modern Fiction」에서도 개진했듯이, 현실은 전통 소설에서 묘사하는 바와 같이 사실주의적인 세부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인상들의 소나기>라고 보며,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통해 그런 삶의 실체를 그려 내려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에 의식의 흐름이니 내적 독백이니 하는 실험적 기법을 도입한 작가요 정신병을 앓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적이고 난해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했던 우울하고 불안한 인물이리라는 선입견이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등대로』를 번역하면서 참조했던 그녀의 자전적 기록들과 일기를 보면 울프는 그런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게 감수성이 풍부하고 발랄한 여성이었으며, 특히 『등대로』에는 작가 자신도 지나치게 <센티멘털>해질까 우려했을 만큼 부모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며 읽었을까?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다.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고, 읽었던 문단을 다시 또 읽고, 그 많은 비유와 묘사의 장면들을 눈 앞에 그려가며 마치 전공서적을 읽듯이 '성심성의껏'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작가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에는 반도 미치지 못한 기분이다.
이전에 읽었던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감상과, 의식의 흐림에 따른 글쓰기라는 방법으로 여성의 감성들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표현하는 여성작가라는 인식때문에, 나는 혼자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을 대상으로 할 때만 잘 쓰는 작가라고 넘겨짚고 있었다. 그래서 책의 앞부분에서 나이와 성별과 다양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의 시각을 하나하나 다르게, 또 섬세하게 표현하는 점에서 굉장히 놀랐다. 한편으론 이렇게 타인에 대해 관찰력이 뛰어나고 감정이입을 잘하고 장면과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너무 예민해서 삶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해설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오히려 '발랄한 여성'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음에도, 그렇다면 왜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 하는 의문만 더 강하게 드는 것이다.
해설 부분에서 작가는 이미 댈러웨이 부인을 완성할 때 쯔음 '등대로'의 구상에 들어갔고, 중간중간 몸이 아파서 글을 쓰지 못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이 소설을 굉장히 열정적으로 쓰고 싶어 했다고 나와 있다. 개인적으로 두 작품중 전자는 여성의 감수성, 특정한 여인의 삶에 촛점이 그려진데 비해 후자는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죽음, 관계를 맺는 것이나 '등대'로 상징되는 것의 덧없음 등이 그려져 있어 훨씬 더 뛰어난 작품이 아닌가 싶다. 마시면 마실수록 농후한 맛의 스펙트럼이 그려지는 와인같다. 그러면서도 시시때때로 변하는 화자들의 생각이 그림을 가까이서 보았다가 멀리서 보았다가 하는 것처럼, 혹은 하나의 사소한 장면과 시선에서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을 끌어내는 것이 읽는 내내 멋진 글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구성에 있어서도 역자 해설 부분에서 잘 설명되어 있는데, 첫번째 장인 '창문'을 읽는 동안 나 역시 램지부인에 대해 애정이 싹튼 터라 갑자기 두번째 장에서 그녀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괄호 속의 한 줄 문장으로 죽었다고 이야기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치 드라마에서 '몇년 후'라고 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키듯 세번째 장에서 램지부인이 없는, 다른 몇몇의 인물도 죽음을 맞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계속 하는데, 어떻게 이런 구상을 했을까 놀라울 뿐이었다. 마지막 등대가 상징하는 부분까지 읽고 나니, 두번째 장에서 그렇게 세월의 흐름을 무상하게 표현한 것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버지니아 울프가 쓴 작가의 일기가 책으로 나와 있어 언젠가 그녀의 작품을 많이 읽고 난 뒤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