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ght Night
스트레스를 말하는 법. 본문
주말에 보일러 배관이 터져 베란다가 물바다가 되었다. 일요일에 보일러업체에 연락을 했는데 당일 출동이 안된다고 하여 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결국 보일러 문제는 아니라는 얘길 듣고 사설 수리업체를 불러 바닥을 뜯고 어찌저찌 수리를 끝내긴 했다. 집주인에게도 연락은 했는데 바로 옆 아파트 단지에 사는 집주인 아저씨가 공사하는 걸 보러 오셨다. 온다는 말도 없이 와서 결혼한지 1년이 되었는데 아직 아기는 없냐는 말을 마치 안부인사처럼 건넬 때부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거실에 놓인 물건 이것저것을 건드려보질 않나, 방문은 다 열어보고 싶은 모양새였고 즐겁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대화를 계속 받아줘야만 했다. 게다가 분명 아직 애가 없다고 얘길 했는데도 내 배를 보더니 '홀몸이 아닌것 같다'며 성희롱 같은 말을 해대서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때문인지 화요일에 서울로 가야해서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데도 계속 피곤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30분만 더 자려고 누웠는데 시어머니가 전화가 왔다. 목이 잠긴 채로 전화를 받았는데 아버님은 좀 어떠시냐며 왜 너희는 전화를 안하냐고 나무라신다. 시댁에 전화를 안한지도 3주가 지났으니 그럴만 했는데도 전화를 끊고 나니 속이 상하기만 한다. 좋은 소식이 없어 전화를 못드렸어요. 아빠는 더이상 색전술도 못 받고 이제 약 드시는 방법밖에 없다고 해요, 이렇게 아빠 상태에 대해 읊조리는게 얼마나 고문같은지 모르겠지. 모르니까 그렇게 물어보는 거겠지. 수술은 처음부터 안된다 했다고 여러번 말씀드렸는데도 자꾸 수술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고 그런 말만 하신다. 지난번에 사돈 뵈었을 때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길래 몸이 좋아지는 줄 아셨다고, 그러시겠죠 손님이 오면 아픈 내색 하기 싫은 아빠가 억지로 밝게 계시니까요, 그런데 손님 돌아가시고 나면 한두시간 꼿꼿이 앉아 있었던 것조차 힘들어서 숨을 몰아쉬며 누워계시기만 하거든요. 이런 얘기는 못했다. 그냥 나는 아빠가 아파도 힘을 내고 싶은데 입밖으로 아빠의 상태에 대해 객관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나 스스로 상태가 좋지 않음을 재확인 하는 것이라 힘들다. 복수가 계속 차고 부종이 발등과 발목에도 나타났는게 그게 다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걸 울지 않고 얘기하는게 힘들어 남편 앞에서도 얘기를 꺼리는걸 모르겠지.
뾰족해지고 비뚤어졌다. 아빠의 안부를 묻는 이들이 걱정에 그러는 것인지, 그저 궁금증에 그러는 것인지 의심만 생겨나고 짜증이 난다. 인터넷에 간암, 복수, 부종만 찾아봐도 그게 좋지 않은 증상임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아직 조부모님이 건강하게 계신 시댁 식구들이 지금 내 기분을 알긴 알까. 일주일 뒤에 시댁모임에 나가서 시할아버지의 여든몇세인지 아흔몇세인지의 생일을 축하하며 박수를 치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야 할 내 기분을 알긴 알까.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고 이게 다 내 마음이 비뚤어져서 그런 거니까 내색 안하고 참고 있으려고 하는데 말이다. 남편한테 말하면 그게 남편 탓이 아니고 자신의 가족 탓이 아닌데도 나한테 미안해 할게 분명해서 얘기를 못하고 있음을 말이다.
아빠가 아픈게 익숙해졌다고, 마음도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보일러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와 화요일의 그 선한 의도의 짧은 전화통화에 무너져 버렸다. 몇시간 지나자 입술에 물집이 생기고 스트레스 받고 있음을 몸이 표시를 낸다. 울더라도 남편한테 어느정도 얘기를 해야 했다. 내가 시댁모임에서 표정이 굳어 있을 수 있는데 그건 너희 가족탓도 아니고 내가 노력하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다고. 시댁식구들 한테도 얘기를 해야 했다, 제가 요즘 안부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드릴 정신머리가 아니여서요, 죄송한데 우리집 식구한테 신경쓰느라 시댁엔 소홀해질거 같아요 라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