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ght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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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순간들

피난가방 싸는 중.

앤_ 2017. 4. 11. 17:14


데이지 화분은 소리 없이 티도 안내고 꽃대를 계속 올리고 있다. 며칠전에 가위를 들고 오래된 꽃대 3개를 잘랐다. 계속 꽃을 보려면 더 잘라줘야 하는데 보기에 여전히 싱그러워 보이니 쉽게 가위질을 못하겠다. 작은 포트 3개를 모아 심으면서 너무 붙여서 심은 탓인지 화분이 비좁아 보이기도 한다. 집에 데려오니 짙은 핑크색이던 꽃 색이 점점 옅어지고 새로 올라오는 꽃대는 더 색이 빠져서 거의 하얀 꽃이 많아졌다. 핫핑크라 부담되었는데 색이 빠지니 더 이쁜 것 같다.

최근 한반도 주위로 미국과 중국 군대가 모이고 있다며 전쟁나는거 아니냐는 불안한 소리에 H는 쿨하게도 "선거철이 됐네"라고 했지만, 나는 조용히 피난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작년에 지진 났을 때 아파트가 꿀렁~ 하고 흔들렸던 경험 이후로, 요즘도 가끔 자다가 아파트가 흔들린 것 같은 느낌에 놀라 깰 때가 있다. 아직도 아빠가 내 곁을 떠났다는게 믿어지지 않듯이, 그렇게 상상할 수 없는 재앙과 불행이 내게도 닥칠 수 있다는 게 요즈음 생각이다. 그냥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후유증인가 하면서 가방을 싼다. 일단 싸놓고 쓸모 없어지면 참 다행인 것이고.

아무튼 내게 짐을 꾸릴만한 배낭은 하나 뿐인데, 그렇다보니 피난가방(재난가방이 아니라 자꾸 피난가방이라고 하게 됨;;)을 싸뒀다가 다른 일로 배낭이 필요하면 가방을 다시 풀고 비워뒀다가 또 뭔가 불안하다 소리가 들리면 다시 가방을 싼다;; 이렇게 여러번 가방을 싸다보니 이것도 요령이 좀 생겼다. 처음엔 막연히 재난상황이 닥치면 필요할것 같다는 물건들을 꾸역꾸역 다 쑤셔넣었다. 옷도 여러벌, 물도 큰걸로 한병, 라면, 수건 등등.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진이든 전쟁이든 큰 사고가 나면 우선 이삼일 버티는 것이 우선이고 거기에 내 목숨이 달렸지, 한달이상 재난상태에 빠지는 건 그 이후의 문제인 것 같다. 그래서 최소한의 위생용품, 속옷과 옷은 한벌씩만(입고 있는 것이 있을테니), 수건도 빼고 대신 다용도로 쓸 수 있는 빨아쓰는 행주 여러장을 넣었다. 이 행주는 두툼한 편이라 충분히 수건 대신 쓸 수 있고 잘 마르고 여러장 챙겨도 수건 하나보다 부피가 작다. 물은 500미리 한병, 라면대신 30미리 작은 플라스틱병에 미숫가루를 담고 초콜렛과 젤리를 넣었다. 이쪽이 부피가 훨씬 작다. 일회용 마스크, 구급약, 손목시계 같은 건 피난가방용으로 구비해 놓는게 좋은 것 같다. 맨날 집에 있는거나 쓰던거 급하게 넣어놓으니 결국 다시 뒤져서 꺼내게 되고 불편하다. 인터넷으로 물 정화시키는 작은 알약 같은 건 사놓을까 싶기도 하다.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으나 총도 없이 내가 나를 지켜야 하는 나라에서 이 정도는 요란 떠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무슨 상황이 생기든 내가 이 가방을 메고 집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는 시간만 좀 주어졌으면.

그리고 나는 요즘 땅콩버터에 꽂혔다. 빵에다 땅콩버터를 발라 먹는 것인지 땅콩버터를 먹기 위해 빵을 먹는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통밀이라 묵직한 빵을 통째로 하나 땅콩버터 발라서 다 먹는다 ㅜㅜ H는 캐나다에서 어학연수 하는 동안 하숙했던 집에서 아침마다 식빵에다 땅콩버터만 발라 샌드위치로 싸줬다는데, 그게 너무 끔찍해서 아직도 땅콩버터라면 쳐다보기도 싫어한다. 그래서 몰래 사놓고 먹는다 ㅋㅋ 땅콩버터 사면서 다 먹은 잼도 새로 하나 샀는데 땅콩버터 반 넘게 먹는 동안 잼은 아직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땅콩버터 칼로리 확인도 아직 안했음. 난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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