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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순간들/아빠

160925 일요일. 일주일 만에 집으로.

앤_ 2016. 10. 5. 20:01

어제 잠들기 전, 엄마가 복층 계단 아래에 있는 오래된 생수통을 꺼냈다.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직접 담그신 매실 액기스라고 한다. 우리가 그 집에 이사를 왔을 때 넣어둔 것으로 최소한 25년 이상 된 것이다. 그 정도 묵혔으면 충분하다 생각하신 것인지, 어쩌다 얘기가 나와 기억이 나신 것인지 엄마의 속은 모르겠지만 그걸 꺼내자고 하셨다. 복층 계단 아래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가 있는데 가장 깊은 곳, 다 큰 우리들은 허리를 굽혀도 들어가기 힘든 구석에 생수통이 있었다. 무거워서 남편에게 꺼내달라고 했다. 입구는 비닐로 묶어져 있고 하얗게 먼지가 쌓였으며, 겉에서 보기엔 시커먼 액체가 들었는데 움직일 때 찰랑거리는 느낌이 들어 액기스가 아니고 포도주가 아닌가 했다. 사실 안쪽엔 큰 생수통이 두개가 들었는데 엄마도 하나는 포도주, 하나는 매실액기스로 기억한다며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그릇에 조금 따라내 보니 더욱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엄마가 찍어 먹어 보시곤 매실액이라고 한다. 물을 조금 타서 남편에게 줬더니 후룩 마신다. 단맛은 없고 향도 없는데 조금 새콤한 맛은 남아 있었다. 엄마가 이렇게 오래된 건 약이라며 페트병을 찾아 씻어놓고 내일 담아가라고 하셨다. 남편이 가끔 속쓰릴 때 매실쥬스를 마신다는 걸 듣고 챙겨주시려는 듯 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벌써 밖이 분주했다. 가까이 사시는 막내삼촌이 오셨다. 본가집은 주택이라 철마다, 날씨가 변할 때마다 여기저기 손보고 점검해야 할 곳이 많았다. 당연히 힘을 써야 하는 부분들도 있다. 엄마는 이제 화분도 다 처분해야 한다고 했다. 겨울이면 마당에서 집안으로 화분을 다 들여야 하는데 엄마 혼자서는 옮길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말은 아직까지 바늘이 되어 나를 찌른다.  막내삼촌은 본가와 가까이 살고 계신다. 내가 중학생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이듬해 어버이날 막내삼촌은 이제 아버지대신 형한테 드린다며 카네이션을 가지고 왔었다. 일을 다 도와주고 밥을 먹고 가라는 엄마의 만류에도 삼촌은 진짜로 아침을 먹고 왔다며 떠나셨다. 서울 잘 다녀오라고 나와도 눈이 마주쳤다. 무엇이 담겼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눈이었다. 그저 눈이 마주치고 나는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는데, 그 때 내 표정이 어땠을지, 그마저도 모르겠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짐을 가득 싣고 출발했다. 일주일만에 집에 간다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집이 어떨지 고양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또 우리집 고양이들과 조우할 부모님도 걱정이 되었다. 본가에서 대전 우리집까지는 넉넉하게 3시간 정도 걸린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 갓 만들어진 호두과자 냄새가 좋아 작은 한 봉지를 샀고, 남편이 어묵 핫바를 먹고 싶어 해서 사주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아빠한테 갔는데 어묵을 먹는 남편을 보고 맛있냐며 아빠것도 하나 사오라고 했다. 아빠가 뭐 먹고 싶다고 하는 말이 너무 반가웠다. 내가 달리듯 가서 어묵을 하나 사왔고 화장실에 다녀온 엄마도 아빠가 어묵을 먹고 있는 걸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서 싸온 포도와 호두과자를 먹고 있는데 따뜻한 호두과자도 맛있었다. 그래서 그것도 한봉지 더 사왔다. 충분히 쉬고 먹은 뒤 다시 고속도로에 올랐다.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재미난 일이 있었다. 아빠가 서울에 처음 가셨을 때, 오빠네 집 주변을 한바퀴 걸으며 로또를 파는 곳에서 오빠와 나에게 로또를 하나씩 사주었다. 그때만 해도 아빠의 상태가 어떤지 알기 전이었고, 나는 당장 내일모레 아빠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로또를 사주자 그게 마치 아빠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는 선물같아서 너무 슬펐다. 잃어버리지 않게 지갑 안쪽에 넣어두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아빠가 로또 확인해 봤냐고 했고, 차에서 맞추어 보았는데 4등에 당첨되었다. 내가 숫자 4개가 맞다고 하자 아빠가 '한 장에 4개가 맞는게 아니고 한 줄에 4개가 맞아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다시 확인해도 4등이 맞았고 당첨금은 5만원이었다. 하나만 더 맞았으면 백만원이 넘었을 텐데 라며, 또 아빠가 2장을 사서 오빠와 나에게 나눠줬는데 내가 이걸 받아서 다행이라며 즐거워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오빠가 가져간 건 당첨이 안되었다고 한다. 내가 5만원에 당첨되었다고 하자 올케언니가 3분의 1씩 나누기로 하지 않았냐고 해서 또 웃었다. 아직 당첨금으로 바꾸진 않았는데 이걸 바꿔야 할지 그냥 가지고 있을지 아직 고민중이다.

대전으로 돌아왔다. 남편 혼자 지냈던 집은 웃음만 나왔다. 얼핏보면 이것저것 물건을 정리한 티가 났지만 내가 떠난 후 한번도 청소기를 돌리지 않았는지 바닥엔 내 머리카락과 일주일치 고양이털이 가득. 소파는 고양이들이 자주 누워 지내는 곳이라 털이 붙지 않게 항상 얇은 이불들을 덮어 놓고 매일 이불을 털거나 돌돌이로 털을 떼주거나, 이삼일에 한번씩 새걸로 갈고 빨아줘야 하는데 그냥 털구덩이. 그걸 모르는 아빠는 소파에 그냥 앉아서 양복 바지에 털이 가득 붙고, 나는 허둥지둥 청소기를 돌리고 새이불로 바꾸고 아빠 바지에 붙은 털을 떼어냈다. 여느때 같으면 고양이와 털에 대해 잔소리를 퍼부었을 텐데 엄마에게 이제 다른 일상들은 무관심해 진 것인지, 아니면 오빠네 집의 고양이와 며칠 지내서 조금 무던해 진 것인지 그렇게 심한 잔소리는 없었다. 

점심을 간단히 차려 먹은 것 같다. 그리고 안방에 아빠를 위한 이불을 폈다. 결혼 후 이사를 자주 다닐 운명 때문에 침대를 사지 않았는데 그래서 엄마가 허리가 아프지 않게 도톰한 깔개를 찾아 사주었다. 그 브랜드의 이불이 좋다며 이불도 사주고 베개도 사주고, 이후에 손님이 오면 손님용 이불이 필요하다고 해서 또 이불 한 세트를 샀는데 그걸 꺼냈다. 아빠가 주무시는 동안 엄마가 본가에서부터 가져온 생강을 꺼냈다. 추석전에 김치 담그려고 많이 샀는데 그 뒤로 정신이 없어 손질을 못해 상했다며 생강청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 엄마와 앉아 생강을 다듬었다. 전망이 좋고 앞이 트인 우리집의 베란다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가득 들어왔다. 엄마는 해가 드는 것이 좋다고 해서 블라인드도 올리고 거실등도 껐다. 그리고 장조림도 만들어 우리집에도 좀 두고 오빠네 집에도 가져다 줘야 겠다며 고기도 삶았다. 엄마가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쉴수도 없고 가만히 누워있지도 못하겠다고 했다. 

저녁은 전에 시어머니가 보내주신 한치를 데치고 소고기를 구워먹기로 했다. 시골집에서부터 가져온 어린 배춧잎으로 겉절이를 가득 만드셨다. 노을이 지려고 했고 그걸 보여주고 싶어서 잠깐 잠이 든 남편도 깨웠고 아빠도 불렀다. 둘만 있을 때는 쓰지 않는 큰 상이 가득 찼다. 배추 겉절이는 스텐볼에 가득 만들었는데 다 동이 났다. 남편이 항상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다며 엄마가 좋아하셨다. 아빠는 아프신 뒤로는 고기를 잘 드시지 않는다. 소화가 안될까봐 걱정도 되시는 것 같고, 암 때문에 채식을 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맛있게 드셨다. 밥을 먹고 엄마와 남편과 셋이서 집에서 좀 떨어진 시장까지 갔다. 입원하면 세수할 때 작은 바가지와 비누를 담을 통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엄마가 무릎이 아파서 많이 걷기 힘드실텐데 주변에는 파는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또 짐을 쌌다. 오빠네 집에서 계속 지내다보니 굳이 샴푸를 싸갈 필요가 없어서 뺐다. 옷도 너무 두꺼운 옷은 필요가 없길래 빼고 반팔티와 잠옷바지를 더 챙겼다. 노트북은 무거워서 고민을 했지만 아빠가 병원에 입원하면 면회시간 외에는 갈곳도 없고 할일도 없을 것 같아 챙겼다. 내일은 지난번에 찍은 mri 결과를 듣고 아빠가 입원을 하는 날이다. 우리는 6시반엔 출발하기로 했다. 자려고 누워 휴대폰을 조금 만지작 거리다 곧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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