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ght Night

160926 월요일. 첫 입원. 본문

일상의 순간들/아빠

160926 월요일. 첫 입원.

앤_ 2016. 10. 5. 21:32

6시 반에 출발했다. 남편이 운전을 했다. 벌써 며칠 째 운전을 많이 해서 피곤할텐데 그래도 내가 하는 것보다는 남편이 운전하는게 모두가 더 편하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를까 했는데 서지 않고 그냥 서울로 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9시가 채 안되었던 것 같다. 월요일이고 남편은 휴가를 냈는데도 8시 반부터 외부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 도착해 부모님께 먼저 로비로 가시라고 하고 우리는 지하로 가서 주차를 했다. 남편은 업무전화를 받아야 해서 나중에 올라간다고 해서 내가 먼저 올라갔다. 접수처로 갔더니 오늘따라 간센터 쪽은 사람이 적어 보였다. 우리 진료 예약 시간은 11시 10분이었는데 빨리 접수하면 진료를 빨리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검사결과는 오빠가 같이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기다렸다. 오빠는 10시 정도에 도착했는데 그때 접수를 하니 이미 사람이 많아져 결국 한참 기다려 원래 예약시간에 진료를 받았다. 

며칠전에 색전술을 위한 mri 촬영과 다른 곳으로 전이가 있는지에 대해 검사한 결과를 듣는 날이다. 우리 담당 진료의 선생님은 말이 없고 웃는 것 같아도 표정이 없는 사람이다. 가만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때 보면 1분에 1명씩 진료를 보는 것 처럼 여겨질 정도로 하루에 보는 환자가 많았다. 큰 병원에, 아마 환자 대부분은 우리처럼 지역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사람들일테고, 그들의 간절함 역시 우리와 비슷할텐데도 진료시간은 매우 짧았다. 우리는 진료의의 환경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도 서운한 부분도 컸다. 먼 지방에서 동아줄 처럼 치료를 받기 위해 왔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비싼 진료비를 내고 진료를 받으며 병원 곳곳에 '환자의 권리'따위가 붙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진료는 너무 짧고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만을 표시하고 싶어도 혹시나 환자에게 불이익이 갈까봐 입을 열지도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진료의가 웃으며 '다행히 폐나 뼈로의 전이는 없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의사로서는 '암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나 '전이는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나 사실을 말한 것 뿐이겠지만, 나에겐 우주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mri 결과에서는 간에 있는 종양이 13센치 정도로 크고 간의 좌엽에도 작은 종양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예약된데로 바로 입원하시고 내일 색전술을 받기로 했다. 색전술은 두개의 종양 모두에 시술되고, 간문맥에 침투된 것은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했다. 완치는 어렵지만 치료를 통해 더 오래 사실 수 있도록 해보자고 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진료 후 밖에 잠깐 앉아 있으면 간호사 선생님이 그 다음 진료예약이나 입원에 대한 것을 알려준다. 일단 입원실 배정은 소화기내과 쪽 병실이 없어 다른 병동의 병실에 입원해야 한다며 2인실이라고 알려주었다. 입원까지는 몇시간 더 있어야 해서 우선 오빠네 집으로 돌아갔다가 입원 시간에 맞춰 다시 병원으로 오기로 했다. 오빠네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모두가 전이가 없어 천만다행이라며 입을 모았다. 다행. 다행. 모두가 다행이란 것은 없음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힘을 주기 위해 우리는 그 단어를 쓴다.

오빠네 집으로 도착했다. 언니가 오전에 출근했다가 집으로 왔는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점심을 차려드렸고 엄마와 우리들은 나가서 먹기로 했다. 점심시간이라 강남역 주변은 사람이 많았는데 1시가 되면 나가기로 했고 그동안 언니와 남편은 업무전화를 끊임없이 받았다. 특히 남편은 운전할 때 빼고는 계속 전화하고 메모하고 정말 잠시도 일에서 분리되지 못했다. 고맙고 미안했다. 

내가 고기를 안먹기 때문에 나가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사보텐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도착해서 건너편에 있는 콩나물국밥집을 보고는 엄마가 거기에 가자고 했다. 나는 사보텐이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엄마에게 돈까스보다는 콩나물국밥이나 비빔밥이 더 입에 맞을 것 같아서 그곳으로 갔다. 비빔밥이 하나에 1만원이라는 사실에 엄마는 신경질을 냈다. 오빠가 강남에서 이 정도에 1만원이면 싼편이라고 자꾸 돈얘기 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었다. 비빔밥 그릇에 고추장이 담겨서 나오는데 엄마가 비비고 나서 보니 너무 짜다고 했고, 공기밥을 더 시킬 수 있냐고 물었더니 밥은 셀프로 더 가져가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오빠가 가져다 주었다. 밥을 먹을 때 즈음 또 언니와 오빠에게 전화가 불같이 왔다. 밥은 우리가 계산을 했다. 오빠네 집으로 돌아와서 입원할 때 가지고 들어갈 짐들을 다시 정리했다. 싸온 것과 저번에 오빠네 집에 두고간 것들 중에 필요없을 만한 물건들은 추려서 빼냈다.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암센터쪽 5층 병동이었다. 삼성병원은 면회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외 시간에는 각 층 엘레베이터 입구에서 면회객의 입장을 제한한다. 우리는 이불이며 짐을 잔뜩 들고 오늘 입원할 환자라고 하자 통과되었다. 간호사실 접수대에서 몇가지 사인을 하고 설명을 듣고 출입증을 받았다. 바코드가 인쇄된 작은 출입증은 2개를 받는다. 하나는 목걸이에 넣어서 간병인이 쓰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교대용 또는 분실시 사용을 위한 것이다. 이 출입증은 면회시간 외에도 병동에 출입할 수 있는 것으로 덕분에 엄마가 병원에 상주하는 동안 나는 자유로이 아빠가 입원한 곳에 출입을 했다. 출입증 바코드 기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접수한 시간과 기다린 시간 동안 부모님이 서서 오래 기다려야 했다. 간호사 데스크 앞에는 따로 대기하는 의자도 없어서 아빠가 힘에 부칠까봐 걱정이 되었다. 

병실은 2인실이었다. 입원료는 2인실은 20만원이 좀 넘고 6인실은 2만원이 좀 넘는다. 워낙 병실이 없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나마 2인실이라도 배정된게 어디냐고 생각했다. 내일은 6인실로 갈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건 내일 병실 상황을 봐야 안다고 했다. 아빠는 소화기내과 병동에 입원해야 하는데 병실이 없어서 유방암쪽 병동에 입원한 거였다. 2인실에 먼저 입원해 있던 다른 환자분도 담당의가 우리와 같았고 그분도 소화기내과 환자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5층 병동은 주로 여성환자들이 많고 특실이 같은 층에 있어서인지 병동 전체가 깨끗하고 조용했다. 아빠가 소화기내과쪽 병동으로 옮겨간 후에도 나는 자주 이쪽으로 내려와서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아빠가 병실에 짐을 푸는 동안만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환자는 1명인데 보호자는 엄마, 오빠, 나, 남편까지 4명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계속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먼저 내려가기로 했다. 일도 제대로 볼 수 없고 부모님 곁에 같이 있기도 어려웠다. 5시가 다 된 시간이라 그때 내려간다고 해도 밤에 도착할 수 있지만 원래는 저녁까지 먹고 가기로 했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회사에서 전화가 계속 걸려와 병실 안팎을 다니며 전화를 받고 메모를 하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남편을 배웅하고 오빠와 나는 한시간 더 기다려 6시가 되면 면회시간에 맞춰 부모님을 한번 더 보고 오빠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오빠와 단둘이 1층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슨 얘길 좀 주고받았고 말없이 서로 휴대폰만 하며 앉아 있으니 시간이 되었다. 

6시가 조금 지나서 들어갔는데 벌써 저녁밥이 나와서 환자복을 입은 아빠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엄마의 보호자 식사도 신청해야 겠다고 얘길 했는데 엄마가 보호자 식사가 1만원이 넘는다며 손사레를 쳤다. 오늘은 점심을 조금 늦게 먹고 많이 드셔서 배가 별로 안고프다며 싸온 고구마와 과일을 먹으면 된다고 하셨다. 아빠가 식사하면서도 자꾸 우리보고 이제 가보라고 하셨다. 밥을 다 드시는 것만 기다렸다가 나왔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병원에 다시 오기로 했다. 보호자 식사에 대해 물었더니 3시간 전에만 신청하면 된다고, 내일 아침은 아빠가 금식이라 엄마만 시켜드리기도 뭐해서 내일 신청해야 겠다며 그냥 나왔다. 

오빠와 지하철을 타고 오빠네 집으로 돌아갔다. 참 오랜만에 서울 지하철을 탔고 서울을 걸어다녔다. 부모님만 단둘이 병실에 두고 나오는게 마음이 쓰였다. 계속 걸으니 힘들었지만 한편으론 도움이 되었다. 중간에 언니를 만나 근처 김밥집에서 김밥과 떡볶이를 먹고 들어갔다. 언니와 오빠가 아침에 출근해야 하니 거실에서 자고 나보고 방에서 자라고 양보해 주었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 병원에 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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