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ght Night
눈온 날. 본문
어제 아침 H가 창밖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말로 나를 깨웠다. 제법 늦은 시간까지도 눈이 올 기색은 없었고 일기예보도 따로 본게 없어서 마냥 기뻤다. H는 출근길 걱정을 했지만 나는 속으로 신난 마음을 감추기 바빴다. 나도 서울에 다녀와야 해서 두시간쯤 뒤에 집을 나섰는데 그때는 이미 햇살이 눈부셔서 응달진 곳 빼고는 눈이 거의 다 녹아 있었다.
아빠와 병원에서 같이 밥을 먹으려고 반찬도 몇가지 싸갔는데 그날 하필이면 병원밥이 빨리 나와 12시에 벌써 아빠는 식사를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좀 기다리시라고 하고 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탔다. 12시 반이 좀 지나 황급히 뛰어올라갔다. 아빠는 먹을 사람도 없는데 무슨 반찬을 많이 해왔냐고 하셨고, 둘이서 함께 먹었지만 병원식사로 나온 반찬들도 있어 찬이 좀 남았다. 두고 갈테니 드시라고 했지만 엄마도 없고 아빠 혼자서는 절대로 다 못 먹는다고, 또 그 날 오후에 경기도 멀리에 사시는 이모가 김치와 나물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셔서 냉장고도 비좁고, 버리면 아까우니 다시 가지고 가라고 해서 결국 다시 싸가지고 내려왔다. 옛날엔 식사량이 정말 많은 분이었는데 이제는 소화기능이 많이 떨어져서 병원식사로 나오는 것도 밥은 많이 남기시고 반찬만 겨우 다 드신다. 바깥 음식 잘못 드시면 혹시 탈이라도 날까봐 걱정도 많다. 다른 사람들이 가져오는 음식은 먹을만큼 먹고 이삼일 지나면 그냥 다 버리시라고 해도 버리는게 아깝다고만 하니 아빠가 부담느끼지 않게 그냥 다시 다 가져왔다. 그래도 밥 먹을때 반찬 늘어놓고 사진도 찍고 엄마한테도 보내줬다. 그 사진을 자꾸 들여다 보셨다.
다음주에는 병원에서 검사결과가 나온다. 결과만 듣고 고향으로 내려가실 줄 알았는데 아빠가 검사결과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3월까지 그냥 병원에 있겠다고 한다. 고향집에 내려가도 겨울이라 할일도 없고 엄마가 세끼 챙겨주느라 아빠한테 매여만 있으니 보일러 기름 값도 안나오고 병원에 있는게 좋으시단다. 나도 아빠가 복수나, 부종이나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거나 혹은 응급상황이라도 생길까봐 고향집에 단둘이 계시는 것보단 병원에 계시는게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엄마 없이 아빠 혼자 병원에 있는 건 또 걱정이다. 아빠는 집에서든 병원에서든 냉장고 안에 반찬이 아무리 있어도 꺼내먹질 않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 엄마가 곁에 없으면 솔직히 뭐 챙겨드시기는 하나 걱정이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칫솔과 각티슈를 갖다달라고 해서 가져갔는데, 사실 이런건 병원 근처에서 다 사면 되실 것을 그게 '귀찮다고'(경상도 남자들이 흔히 쓰는 핑계이자 거짓말) 그냥 병원에 계셨단다.
또 아빠가 장기간 병원에 계시면 드는 걱정중에 하나는 서울에 사는 오빠랑 올케언니가 너무 힘들거 같기 때문이다. 오빠네 집 근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병원이 있기 때문에 둘다 일찍 퇴근하면 들르고 주말에도 아빠와 시간을 보내는데, 그게 말이 쉽지 실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퇴근하면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을 테고, 오며가며 들른다지만 이렇게 추운날 걸어서 다닐 거리도 아니기 때문에 만원버스를 타고 다녀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아빠가 아프신 뒤로 부모님 걱정에 매여 있는 몇달간이었고 오빠와 언니에게도 이제 좀 휴식이 필요할텐데 3월까지 계속 아빠에게 매여 있을까봐 걱정이다.
오늘 낮에 시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내일 시골 내려가는 일로 전화를 하셨는데 어제 서울 병원에 다녀온 얘기를 했다. 혼자 계셔도 되냐며 자주 다녀오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전화임에도 지난번처럼 예민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 보니 이번주는 호르몬이 착하게 구는 중인가 보다. 지난번에 이 스트레스로 끙끙거리며 블로그에도 장문의 글을 쓰고 며칠은 인상만 쓰고 다니고 그랬더니 좀 누그러든 것인지, 아니면 어제 서울에 다녀왔기 때문에 마음이 좀 편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부모님과 떨어져 있으면 걱정되고 마음이 쓰이고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더 심하기 아프시기 전에) 잘해드려야 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랬다가 부모님과 며칠 붙어 지내면 부모님이 주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이 반복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나는 배탈이 났다. 지난주에 백화점 식당가에 오픈한 스시부페를 갔었는데, 오픈한지 얼마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이 신선하지 않았는지 그 날 밤에 자정부터 배가 너무 아파서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 뒤로 지금까지 아랫배가 콕콕 찌르듯이 아픈데 이게 병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계속 참았다. 그런데 오늘은 일어나서 음식을 먹으니 바로 아랫배에 통증이 오고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ㅜㅜ 주말에는 시골의 시댁에 다녀와야 하고 거기는 화장실을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환경이 못되는데.. 주말 지나고서도 계속 이러면 병원을 가긴 가야겠다.
눈은 뽀득뽀득 소리나게 걷는 재미인데 그럴 틈이 없었네.